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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생전 한 점 팔린 「붉은포도밭」
작성일 : 16-11-19 22:00

고흐 생전 한 점 팔린 「붉은포도밭」

 

최병규 박사
기독교미래연구원장
교회사

 

후기인상파 화가이자 서구 예술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는 네덜란드의 목사님의 아들이었다. 그의 가문은 예술과 종교로 특징지어진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에 살았던 Cornelius van Gogh와 아들 Matthias는 둘 다 성직자였고, 1729-1802까지 살았던 Vincent van Gogh 역시 성공한 조각가였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조카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는데 그 조카들 가운데 한명이 헤이그에 위치한 Cloister Church의 성경 교사 겸 목사였던 요하네스였는데, 그의 아들 Vincent van Gogh(1789-1874)가 위대한 화가 Vincent van Gogh의 할아버지였다. 그 할아버지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Theodorus van Gogh(1822-1885)로 고흐의 아버지였다(cf. Kathleen P. Erickson, At Eternity’s Gate, ch.1).

이처럼 예술가와 목회자들을 배출해낸 van Gogh 가문에서 태어났던 세계적인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어릴 적부터 진지하고 조용하며 생각이 깊었다. 그는 한때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 남부 벨기에에 선교사(missionary)로 헌신하여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1879년 1월부터 6개월간의 임시직으로 보리나주(Borinage)의 탄광촌 Petit-Wasmes 지역에서 활동). 그는 크리스천들의 가정에서 저녁 시간에 열리던 성경 읽기 모임에서 겨자씨 비유, 마른 무화과 비유,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 베들레헴의 구유와 크리스마스, 땅 위의 평화 등에 대한 본문을 읽기도 했다(Petit-Wasmes, 26 Dec. 1878). 그렇지만 그해 6월 말경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그 직분을 계속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이후 그는 그림의 세계로 옮겨갔다. 화가로서의 삶으로 전환한 고흐에게 제일 중요한 후원자는 그의 동생 테오였다. Theo의 격려와 재정 후원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고흐는 그림 작업을 할 수 없었을 것이며 세계적인 명성 또한 얻지 못했을 것이다. 목사의 아들들은 서로 힘이 되어주었다. 그들의 삶이 평탄하지 않았지만 끝까지 형제우애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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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풍경, 정물, 초상화 등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정신질환(여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음)과 가난에 시달리다가 37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 짧은 10여 년의 기간 동안, 특히 마지막 2년 사이에 대부분의 그림들을 그린 것이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860여 점의 유화를 포함해 2,100여 점이 된다고 한다. 고흐는 초기에 기독교 사상을 전하면서 실천하려고 전도사 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그가 여러 문제들로 제도적인 교회는 떠났을지라도 그 내면에 종교적인 영성이 사라져버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cf. Erickson 전술한 책 참조).


그러면 고흐는 그가 살아 있을 때 몇 점의 그림을 팔 수 있었을까? 그 가난했던 화가는 다작을 했지만 생존 시에 팔았던 그림은 단 한 점밖에 없었다고 오랫동안 알려져 왔다. 고흐는 그 한 점의 그림이 팔리고 난 다음에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그 소식을 전할 정도였던 것을 보면 그 한 순간은 정말 유쾌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그림의 제목은 ‘붉은 포도밭’(The Red Vineyard), 그리고 그것을 구매해준 사람은 그 고마운 여류 화가의 이름은 안나 보흐(Anna Boch)! 그녀는 고흐의 친구 유진 보흐(Eugene Boch)의 누나였으며 아름다운 정신과 예술 세계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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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보흐의 그림 Falaise - Cote de Bretagne(62*84cm, Oil on canvas)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참으로 평화롭고도 아름다운 풍경화가 아닐 수 없다. 기다랗게 뻗은 해안 절벽, 오른 쪽 절벽위에는 한번쯤 걸어보고 싶은 언덕이 있고 해안의 왼편 저 멀리엔 돛을 단 배가 보인다.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이 아름다운 정경 속에서 관객은 쉬게 된다. 안나 보흐는 그런 곳을 여행하면서 풍경을 그렸다. 그녀는 벨기에의 예술가 그룹인 20인회(Les XX)에서 만난 Théo van Rysselberghe의 영향을 받아 인상주의 방식으로 그렸다. 그 당시 20인전은 회원들 작품 말고도 초대 화가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했다. 그 전시회에 고흐도 1889년 11월에 초청을 받았다. 1890년 1월에 개최된 그 전시회에 고흐는 6점(해바라기 그림 2점, 아이비, 꽃이 핀 과수원(Arles), 밀밭(St-Rémy), 붉은포도밭(Montmajour)을 내었고, 그 가운데 한 점을 자신의 친구 유진 보흐의 누나 Anna Boch가 사주었다. 그 그림이 바로 붉은포도밭이다. 그녀가 구매한 The Red Vineyard는 고흐가 1888년 11월에 그린 것으로 고흐 생시에 공식적으로 팔았던 유일한 그림으로 알려져 왔다. 고흐의 동생 Theo의 장부에는 400 프랑(오늘날 대략 $1,000-1,050 정도)에 팔렸다. 테오는 그 그림을 Les Vingt의 그 전시회에 보내기 위해 포장하는데 21.60 프랑을 썼다고 한다.

안나 보흐가 소장했던 많은 작품들은 그녀 사후에 팔렸고, 그녀의 뜻을 따라, 가난했던 화가친구들의 은퇴를 위해 그 돈을 지불하도록 기증했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들 가운데 140여 점이 그녀가 대모가 되어주었던  Ida van Haelewijn에게 남겨졌는데, Ida는 안나의 정원사의 딸이었고, 그 그림들 중의 많은 그림들이 Ida의 어린 소녀 시절의 모습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1968년에는 안나의 조카의 아들(great nephew)이자 빌레로이 앤 보흐(Villeroy & Boch)사의 회장이었던 Luitwin von Boch가 구매했고, 1992년 Ida가 죽을 때까지 Ida의 집에 두었다. 2011년 3월에는 안나와 유진 보흐 그림 엑스포가 개최되었다고 한다. 안나의 몇몇 그림들은 안자 자신에 의해 여러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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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보흐가 소장했던 많은 작품들은 그녀 사후에 팔렸고, 그녀의 뜻을 따라, 가난했던 화가친구들의 은퇴를 위해 그 돈을 지불하도록 기증했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들 가운데 140여 점이 그녀가 대모가 되어주었던  Ida van Haelewijn에게 남겨졌는데, Ida는 안나의 정원사의 딸이었고, 그 그림들 중의 많은 그림들이 Ida의 어린 소녀 시절의 모습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1968년에는 안나의 조카의 아들(great nephew)이자 빌레로이 앤 보흐(Villeroy & Boch)사의 회장이었던 Luitwin von Boch가 구매했고, 1992년 Ida가 죽을 때까지 Ida의 집에 두었다. 2011년 3월에는 안나와 유진 보흐 그림 엑스포가 개최되었다고 한다. 안나의 몇몇 그림들은 안자 자신에 의해 여러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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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보흐는 고흐 보다 몇 살 많았고, 고흐는 안나의 남동생이자 자신의 친구였던 유진 보다 나이가 많았다(종종 어떤 이들이 안나를 유진의 동생인 양 잘 못 알고 있는 것을 본다). 누나 안나와 동생 유진의 가문 즉 보흐 가문은 대대로 도자기 공장을 운영해왔던 부유한 가문이었다. 그 가문의 이름을 볼 수 있는 것은 오늘날도 운영되고 있는 회사인 빌레로이 앤 보흐의 이름이다. Boch 가문은 1750년경부터 도자기 회사를 운영해왔고, 룩셈부르크에 도자기 가마를 설치했다.  1812년 경 Jean-Francois Boch는 Mettlach에도 가마를 세웠다. 그러다가 1836년 경에 Jean은 그의 경쟁자였던 Nicolas Villeroy와 회사를 합병해서 회사이름을 Villeroy & Boch, (V&B, also simply 'VB')로 일컬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Boch가문의 이름이 도자기 회사의 이름에도 남아있다. 그렇지만 룩셈부르크 회사는 2010년 경 문을 닫고 독일(Mettlach)에서만 제작되고 있다고 한다.

유진 보흐의 모습에 대하여 고흐는 테오에게 얘기해준 바 있다. 유진과 빈센트는 좋은 우정관계에 있었다. 고흐가 1888년에 그리고 그의 침실 벽에 걸어놓았던 보흐의 초상화 제목은 ‘시인 유진 보흐’(The Poet. Eugene Boch)이다. 이 초상화는 고흐가 죽을 때까지도 고흐의 침실에 걸려 있었다. 고흐의 침실 그림은 3개의 버전이 있는데(Van Gogh Museum, Musee d'Orsay, Art Institutue of Chicago) 반 고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 그림에는 유진 보흐의 초상화로 보이는 그림이 함께 나타난다. 실제로 고흐도 유진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진에 대한 좋은 인상을 전하고 있다. 그 그림에서 고흐는 밝은 이마와 대조적으로 배경을 짙은 블루를 쓰면서 어떤 신비로운 느낌을 표출하려고 했다(11 August 1888). 이 유진 보흐의 초상화는 고흐가 죽은 수개 월 후에 동생 테오까지 죽자 그의 미망인에 의하여 유진 보흐에게 기증되었으며, 몇 단계를 거쳐 나중에는 유진 보흐의 침실에 30여 년 동안 걸려 있었다. 유진 보흐는 임종이 다가왔을 때도 그 옛날 고흐가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를 응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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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Gogh는 어떻게 해서 Eugene Boch와 교제할 수 있게 되었을까? 고흐가 유진 보흐를 알지 못했다면 그의 생전에 단 점 팔렸다고 하는 그 그림은 그의 누나 안나 보흐에게 넘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안나가 사주지 않았다면 고흐는 생시에 자신의 그림을 한 점도 팔 수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고흐는 어느 날 우연히 유진을 만나게 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관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것 같다. Eugene은 1888년 6월 Dodge Macknight(1860–1950)에 의해 고흐에게 소개되었다. Macknight는 미국 화가로서 후기인상파에 속했으며 주로 풍경을 수채화로 그렸다. 고흐가 아를(Arles)에서 살고 있을 때 그는 Fontvieille(남부 프랑스)에 살고 있었다(cf. 고흐가 러셀에게 보낸 편지. 1888년 4월 19일). 그런데 고흐와 맥나이트는 1888년 호주 출신의 인상주의 화가 러셀(John Peter Russell, 1858–1930)을 통하여 만날 수 있었다(그는 고흐의 첫 번째 초상화를 그렸고, 고흐가 평생 연락하고 지냈던 화가임).

Russell은 로댕의 친구이기도 했고 그의 아름다웠던 부인은 로댕의 작품 Minerve sans Casque 속에 남게 되었다. 고흐와 맥나이트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Macknight는 고흐의 친구가 되었고, 그를 벨기에의 화가 Eugene Boch에게 소개시켜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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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고흐 생전에 한 점 팔렸다고 하는 그 그림 「붉은포도밭」은 예술을 사랑하던 누나와 남동생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을 통하여 전시되었고, 안나 보흐가 사주었던 것이다. 안나와 유진 보흐는 그들 주변의 가난한 예술가들을 돌보아주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들 자신들의 화가이면서 다른 가난한 화가들을 보살필 줄 알던 사람들이었다. 안나는 자신의 그림들 외에도 당대 인상파 화가들의 주요 작품들을 소장했다. 그리고 그녀의 동생 유진의 친구였던 고흐를 포함한 여러 젊은 화가들의 활동을 촉진시켜주었다고 한다. 예술은 그것을 사랑하고 후원하는 이들에 의하여 보존되고 증진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 안나 보흐의 경우를 통하여서 볼 수 있는 것 같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자신이 신학 다음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음악이라고 하였다(TR 3, 3815). 물론 그는 음악만이 아니라 다른 예술 장르도 소중하게 여겼음을 다음 말에서 알 수 있다: “군주들과 왕들은 음악의 발전을 위하여 후원해야 하며, 다른 예술들도 후원해야 합니다. 서민은 그것들을 사랑할 수는 있으나 후원할 수는 없습니다(TR 2, 2545a).” 루터는 그 당시의 미술에 대하여도 결코 무시하지 못할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프리드리히의 궁정화가이자 자신의 개혁 사상의 파급을 위해 판화나 다른 그림 작업을 통하여 자신을 지지해 준 지인 Lucas Cranach the Elder와 같은 화가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할 때 고흐와 같은 가난하지만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던 이에게 테오가 후원하고, 안나 보흐와 같은 이가 격려하고, 다른 친구들이 지지해 준 것처럼, 오늘날도 유력한 이들이 열의있고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많은 예술가들을 보호하고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고흐와 테오는 목사와 예술가의 가문이었다. 그들의 예술성과 영성은 그 흔적을 지녀왔음을 우리는 2004년 이슬람의 그릇된 인권(무슬림 여성들을 향한) 문제를 지적하는 단편 다큐멘터리 Submission을 제작하였다가 극단적 무슬림에 의하여 대낮에 암스테르담 거리에서 목숨을 잃은 테오의 증손자요 그와 동명인 테오(Theo van Gogh, 1957–2004)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20161119_215744.png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할 때 고흐와 같은 가난하지만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던 이에게 테오가 후원하고, 안나 보흐와 같은 이가 격려하고, 다른 친구들이 지지해 준 것처럼, 오늘날도 유력한 이들이 열의있고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많은 예술가들을 보호하고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고흐와 테오는 목사와 예술가의 가문이었다. 그들의 예술성과 영성은 그 흔적을 지녀왔음을 우리는 2004년 이슬람의 그릇된 인권(무슬림 여성들을 향한) 문제를 지적하는 단편 다큐멘터리 Submission을 제작하였다가 극단적 무슬림에 의하여 대낮에 암스테르담 거리에서 목숨을 잃은 테오의 증손자요 그와 동명인 테오(Theo van Gogh, 1957–2004)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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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비단 종교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테오나 안나 보흐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예술가들을 대하여야 할 것이며, 크리스천들 재력가들은 더욱 힘써 가난하고도 재능이 있는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육성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목사들은 신자들에게 영성과 예술에 대하여 가르쳐야 하며 탁월한 예술가들이 잘 교육받고 창의적인 작품들을 생산해냄으로써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과업을 위하여 본고에서 살펴본 고흐의 케이스는 하나의 좋은 샘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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