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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적 관점에서 본 한국 장로교 정치 체제의 장단점
작성일 : 17-04-27 13:37
목회적 관점에서 본 한국 장로교 정치 체제의 장단점 : 타 교단이나 세계 교회와 비교하여
  • 유해무(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
  • 승인 2017.04.27 06:27
이 논문은 2017년 4월 20일(목) 서문교회(담임 한진환 목사)당에서 열린 고려신학대학원 신학포럼에서 유해무 교수가 발표한 글이다.- 편집장 주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여기서 개혁은 무엇을 뜻하며, 종교는 무엇을 지칭하는가? 사실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이 역사적 사실을 후대가 돌아보면서 붙인 명칭이 ‘종교개혁’이며 그때부터 종교개혁은 이 사건 자체 또는 별도로 지칭하는 내용과 의미가 달리 첨가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루터가 1517년에 내어 건 역사적 사건에서 95개 조항은 고해성사라는 예배의 한 부분을 비판하였고, 이 비판의 기초는 성경과 성경에서 나온 교리이다. 루터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예배를 왜곡시킨 교황을 향한 공개 토론 제안은 기실 교리의 문제였지만, 교황 일파는 이를 교회정치적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다가 결국 교회분열을 자초하고 말았다.

이런 바탕에서 교황은 루터 선생을 대하였다. 6개월 안에 루터가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출교시킬 것이라고 협박하면서 교황은 1520년 6월 15일에 출교 위협칙서(Exsurge, Domine; 시 73:22=라, 74:23=한)를 발행하였다. 칙서는 루터의 41가지 발언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1520년 12월 10일에 비텐베르크시민들과 교수들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중세 신학서적들과 교회법 법전들(Corpus iuris canonici)과 그리고 그의 이단적 주장들을 철회하지 않으면 출교시키겠다는 위협칙서를 태웠다. “그대가 하나님의 진리를 혼란케 하였기에 나는 그대를 불 속에서 없애버리노라.” 교황은 1521,1,3에 출교칙서(Decet Romanum Pontificem)를 발행했고 루터를 이단으로 선포하였다. 그 이후 로마교회는 이 칙서와 이단 정죄를 철회하지 않고 있다. 교황처럼 성경 말씀과 교리와 예배를 무시하고 교회정치에만 집착하면, 교회 분열은 물론 교리와 성경조차도 짓밟고 말씀의 주인이신 삼위 하나님을 모독하는 끔찍한 범죄에 빠지고 만다. 우리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로마교회의 정치인 교황중심주의와 이에 대한 강력한 대응인 회중정치, 그리고 우리가 표방하는 장로정치와 이를 시행하는 교회정치 현장을 살피려고 한다.

 

1. 교회 정치

교회 정치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다스리게 하시는 방편이다. 주님은 부활하시면서 각자에게 선물을 주셔서 선물을 받은 자들이 자기의 승리를 이 땅에서 나타내도록(顯示) 하셨다. 이런 현시를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직분자들을 주셨으니, 곧 목사/교사이다(엡 4:7-16). 목사와 교사의 사역에서 다른 직분이 나왔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 정치는 교인됨과 직분자의 자격과 사역, 이를 위한 치리회 등을 집중적으로 가르친다. 교회 정치는 교회사에서 다양한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기 때문에 교회정치연구는 교회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교회론에 기초하고 그기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교의학의 한 주제로 다룰 수도 있고, 교회의 건설과 직분의 사역을 실제적으로 겨냥하기 때문에 실천신학의 한 분야일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교회정치는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고 보존하는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주 훼손되고 부패하였다. 따라서 교회정치는 교회사에서 항상 논쟁의 주제였고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며 급기야는 교회정치 자체를 혐오하고 거부하는 운동도 등장하였다. 우리의 표준은 성경이요 우리의 참조점은 개혁신학/장로교정치를 표방하는 웨스트민스터신조와 교회정치를 포함한 부속 문서이기 때문에, 우리 바깥에 있는 교회정치를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교회정치 현장도 비판적으로 성찰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다양한 교회정치와 비교할 필요가 있겠다. 교회정치는 교회의 본질을 파수하기 위한 보조 수단이다.

다수의 장로가 치리하는 장로정치의 출발은 잉글랜드의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아니다. 이미 교회사의 초기부터 장로정치가 있었으나 곧장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중세 교회는 교황 체제 아래에서 장로직분을 변질시키고 올바른 장로정치를 버렸다. 종교개혁, 특히 칼빈의 개혁은 장로직분을 성경적으로 회복하였고 성경과 고대교회의 장로정치의 복귀를 가능하게 하였다. 칼빈(J. Calvin, 1509-1564)으로부터 배운 프랑스의 위그노가 1559년에 첫 총회를 가졌고 낙스(J. Knox, 1513-72)는 칼빈과 위그노로부터 장로정치를 배워 스코틀랜드에서 1560년부터 시행하였다. 당시 브리튼 섬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성공회가 채택한 감독정치를 따르고 있었다. 감독정치는 항상 공권력과 대치하거나 협력하면서 발전하였는데,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감독은 각기 자기들의 왕의 시녀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칼빈이 장로정치를 처음으로 제안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미 고대교회는 장로정치를 시행하였으나 교회의 내적 형편과 공권력과의 관계에서 감독정치가 점차 자리 잡았다. 장로정치는 감독정치를 배태한 교회 내적인 요인에 대한 성경적 비판과 외적 요인인 공권력과의 관계, 곧 정교일치의 상황을 타개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그런데 감독정치를 극단적으로 공격하면서 또 다른 형태의 정치를 제안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입장을 뭉뚱그려 회중정치라 부를 수 있다. 이를 주장하는 이들은 치리의 주체를 일인一人 감독이나 다수의 장로가 아니라 회중 전부로 본다. 칼빈은 감독정치와 회중정치 양자를 다 비판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장로교회 안에서는 어떨 때에는 감독정치, 어떨 때에는 회중정치가 교차하면서 혼란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를 지적하고 개선할 필요가 있다.

 

2. 교회법과 교회정치

우리 헌법에는 교회와 정치와 권징조례가 따로 나오며 내용도 비교적 단출하다. 이것은 종교개혁에서 나온 교회가 교회정치와 권징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즉 우리를 율법과 사람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치리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종의 자녀처럼 법을 몽학선생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 중세 신학이 보였던 번쇄성煩瑣性처럼 중세 교회법전은 아주 광범위하고 복잡하였다. 종교개혁은 중세교회의 예배가 지녔던 복잡성도 거부하고 예배를 단순화하였다. 이런 경향은 잉글랜드의 청교도에게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청교도라는 이름 자체가 지닌 함축적 의미에서 잘 나타나듯, 청교도는 형식적이고 무미건조한 의식을 거부한다. 이런 과정의 결말이 정교분리라면, 중세의 복잡한 교회법은 부분적으로 정치와의 관계에서 생겨났고, 부분적으로는 그 영향을 받아 교회와 직분에 공권력과 세속 정치의 모습이 많이 들어왔다.

이런 외적인 영향을 언급함과 동시에 교회 내적인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하면, 교회정치보다는 교회정치를 포함하는 교회법의 관점에서 다양한 교회정치를 비교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법에는 예배, 교회정치, 권징, 봉사 등이 포함된다. 개혁교회는 교회정치와 권징조례를 합하여 교회질서라 부른다. 그리고 이 질서를 가르치는 과목을 교회법이라고 부른다. 교회법은 가톨릭교회에서도 예부터 사용하였고 정교회와 루터교회에서도 사용한다. 비록 외적으로 보자면 정교분리를 천명한 장로교회가 굳이 공권력과의 관계를 별도로 규정할 필요가 크지 않다 하더라도, 교회정치를 이해하려면 고래로부터 정착된 이 용어를 교회질서와 함께 사용하면 도움이 된다.

초대교회와 바로 이어지는 고대교회에서 장로직 이해와 수행이 점차 정착된다. 팔레스틴과 시리리아 지역에 순회 설교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교회가 확장됨에 따라 지역교회에 토착교인 중에서 감독(ἐπίσκοπος)이 등장하고 집사도 동역한다. 일인 감독제가 아니라 장로(πρεσβύτερος)들의 공동 교육과 말씀 선포 그리고 공동 치리였다(딤전 4:14-16). 사도적 계승은 안수를 통한 임직으로 계승되고 점차 말씀과 성례를 맡은 목사/교사가 분리되어 발전한다. 그런데 80-100년부터 사도적 계승에 기초하여 장로와 같은 직분인 감독직이 점점 자리를 잡고 점차 사제직이라는 의미가 강조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100년이 지나면서 감독과 장로와 집사는 천상의 질서인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사도의 삼직을 땅에서 반영한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동시에 이단이 대거 등장하면서 감독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말라는 경고도 들리기 시작한다. 곧 세례와 성찬과 애찬은 감독의 임석 하에 행해야 한다. 이 때문에 ‘교회’는 이단과 구별된다는 의미가 첨가된다. 이처럼 상당히 일찍부터 감독과 장로의 직무는 나뉘기 시작하고 감독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적인 직분 이해가 자리를 잡는다. 집사는 회중 기도의 인도자로서 기도(λῐτή=litania)를 노래하며, 장로를 보좌한다. 여집사는 여성도를 도우며 심방하고, 세례시에 여성 수세자에게 기름을 바르고, 이들이 장로를 방문할 때도 인도한다. 성인세례가 사라지자 정교회에서는 11세기 경에 여집사직이 폐지된다.

위협적인 영지주의와 여타 이단들을 대항하여 감독 목록이 정통교리와 교회의 보증처럼 등장한다. 이제는 감독교회가 사도적임을 강조한다. 동시에 로마제국의 핍박에 굴복한 배교자의 회개와 이단 세례 등이 현안이 된다. 감독은 점차 교회의 기초이며 일체성의 증표라는 존경을 받는다. 감독은 지역교회 회중이 뽑지만, 인근 교회의 감독들이 임직하는 관례가 생긴다. 그러나 이 제도는 4세기 이후부터 지역교회마다 감독이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감독이 지역의 중심에서 치리하면서 지역교회에 목회자인 장로를 파송하는 방식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이것을 현재 로마 가톨릭교회가 계승하고 있다.

이런 발전과 더불어 장로를 사제로 이해하는 전통이 등장하고 성찬을 제사로 부르기 시작한다. 이미 2세기 초엽부터 세례와 성찬을 포함한 예배, 재정과 치리(권징과 재허입)가 지역교회 감독에게 집중되기 시작하였고, 3세기부터 지역교회는 지역감독(χωρεπίσκοπος)이 격이 낮은 지위를 얻고 지역 중심에만 감독이 주교좌(καθέδρα) 교회에서 목회와 치리를 하면서 이들을 파송하는 형식으로 바뀐다. 그러면서 이들은 감독이 파송하는 장로로서 교리교육과 설교 그리고 때로는 성찬을 집례하였고, 감독의 자문회원이었다. 집사는 재정을 맡아 병자와 노인을 돌보았다. 250년경에 로마교회는 7 지역으로 나누어 70인의 장로와 7 집사가 사역하였다. 교인들은 백성(λαός)이라 불렸다. 교인을 ‘평신도’라고 부르는 표현은 클레멘트서신(40,6; 96년)에 처음 나오는데, 일반 교인들을 집사나 장로와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플라톤 사상의 영향으로 이그나티우스(Ignatius, 35-108년경)와 키프리아누스(Cyprianus, 200-258년경)는 이 위계제도(Hierarchy)를 신적 질서의 반영으로 보았고, 성직자는 주로 사제로 이해되었다. 교회의 제국적 공인과 더불어 성직자와 성직제도는 권력에 편승하면서 문화적으로 귀족화되고, 차츰 평신도는 무식하고 비전문적으로 되어 8세기부터는 예배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로써 성직자는 영적인 반면에 평신도는 육적이라는 성속의 구분이 등장한다. 이로써 중세에는 교회 안에 정착된 두 계층이 존재했다.

교회가 로마제국에서 공인을 받고 국교가 됨에 따라 지역적인 교회법이 활성화되자 이를 통일시킬 필요가 생긴다. 가령 304년 아를(Arles)회의는 변절한 사제가 집례한 세례의 유효성을 논의하고, 집례자의 범죄 여부나 수세자의 영적 상태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하면 유효하다고 결의한다. 325년 니케아 회의는 이 결정을 수용하여 보편적 결정으로 격상시켰다. 이후 교회는 이 결정을 따라 재세례를 금하였다.

476년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지역마다 게르만 왕국이 생기면서 왕국 중심의 교회제도와 교회법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왕이나 하급 영주의 혈족이 감독을 맡는 폐습이 등장하고 로마황제가 공회의를 소집하던 전례를 따라 왕이 교회회의를 소집한다.

 

3. 베드로의 수장권과 로마교회법 등장

고대교회에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고 헬라어를 사용하는 아시아와 유럽 지역에서 라틴어를 사용하는 로마제국의 서쪽으로 확장된다. 그런데 총대교구좌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에 건설한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와 경쟁하였고, 이어서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그리고 예루살렘 순이었다. 이전 통일 로마제국의 수도요 베드로의 순교 무덤이라고 추정되는 터 위에 기념교회를 건립하면서 로마 주교의 수장권 주장으로 나아간다. 이런 로마의 지위는 동방뿐만 아니라 서방에서도 북아프리카, 골(Gaul)의 견제를 받았다.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로마 주교의 수장권은 이노켄티우스 1세(402-417년 재임)가 첨으로 주장한다. 제국의 수도요 교회의 수장을 베드로라는 논거에 근거한다. 로마 주교는 콘스탄티누스로부터 라트란(Latran) 언덕 지역을 하사받아 귀족의 반열에 올랐고, 404년에 서로마제국의 수도가 밀라노에서 라벤나(Ravenna)로 옮겨가자 교권과 더불어 세속권까지 감당한다.

교의서신으로 칼게돈공회의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 레오 1세(440-461 재임)는 최초의 교황이라고 불린다. 그는 마태복음 16:18절 등을 이용하여 베드로의 수장권을 확보한다. 즉 그리스도의 전권을 받은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이며, 로마 주교는 베드로의 후계자이다. 로마 주교는 모든 교회를 살피고 모든 주교가 교회의 머리인 그에게 의존해야 한다. 나아가 이미 이때부터 니케아 회의 위조 결의 6항에 근거하여 무오설도 주장한다(Ecclesia romana semper habuit primatum!). 레오는 황제 발렌티안 3세로부터 교황의 서방교회 수장권이 제국적으로 확립되었다는 칙령까지 얻어낸다.

교황권의 확립에는 750-780년경에 위조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증여(Donatio Constantini)가 크게 기여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미 300년대에 자기의 나병을 치유한 로마 주교에게 로마를 기독교의 머리로 정하고 황제권과 같은 권한을 주교에게 허락하여 모든 교회의 수장으로 선포하고, 교황령도 하사하였다는 내용이다. 물론 서방에만 제한적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8세기 중반까지 이탈리아 반도가 롬바르드족族의 침공으로 위기를 당하였을 때에 교황은 이런 위조문서로 프랑크 왕의 지원을 받았다. 교황이 샤를마뉴를 800년 성탄절에 로마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대관식을 치루면서 교황은 황제가 이전에 임명한 프랑크 제국의 주교를 능가하기 시작한다.

중세가 진전함에 따라, 고대말기부터 정착한 평신도서품(investiture)을 성직매매(Simony)라고 비판하고 폐지하려는 개혁운동이 일어난다. 교황은 이를 위하여 지역 주교의 관할권에서 벗어나 교황의 보호를 직접 받는 수도원을 세우고(exemptio) 단계적으로 주교를 임명하는 영주나 국왕 또는 황제로부터 교권을 점점 빼앗는다(immunitas). 그레고리우스 7세(1073-88)는 프랑스 동남부에서 시작한 클루니수도원을 이런 방식으로 자기의 직할로 만들었고, 이처럼 로마에서 떨어진 수도원의 독립을 로마교회가 말하는 공교회성의 중요한 근거로 삼기 시작한다. 그는 이전 교황들의 정책을 따라 사제들의 혼인을 금하였다. 사제의 독신의무규정은 제 2차 라테란회의(1139년)에서 교의로 결정한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신성로마제국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파문을 선포하고 그에게 카놋사의 굴욕(1077)을 안겨주었다. 이때부터 교황이 대주교에게 어깨띠(pallium)을 주는 관행이 시작된다. 교황의 자문단인 추기경단은 레오 9세(1049-54)가 도입하였고, 알렉산더 3세(1159-81)가 교황은 추기경단의 2/3의 득표 선출된다는 법을 정한다. 이노켄티우스(1198-1216)는 교황을 교회의 머리(caput Ecclesiae)로 보고, 황제권보다 상위라고 주장한다. 교황권의 절정은 보니파티우스 8세(1294-1303)가 1302년에 발표한 칙서(Bulle; Unam Sanctam)이다. 이 칙서는 교황에게 순복하는 것이 구원에 무조건적으로 필요함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교황권에 대하여 교황조차도 공회의에 순복해야 한다는 공회의주의가 반격을 가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로마교회법은 확장된다. 로마교회법전(Corpus Iuris Canonici)은 1917년에 새로운 법전(Codex Iuris Canonici)으로 정리된다. 전자는 다시 6 법전의 총전집이었다. 그라티아누스 교령(Decretum Gratiani)은 1140년경 고대교회와 중세 교회의 교회법 결정사항을 4천 장으로 취합하였다. 별전(Liber Extra)은 그때부터 1234년까지의 결정사항을 5 선집으로 담고 있다. 제 6권(Liber Sextus)은 1234년 이후의 결정 사항을 보니파키우스 8세(1294–1303)가 첨가 형식으로 보완하였다. 클레멘트법전은 비엔느공회의(Vienne, 1311–12)의 결정 사항을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t 5, 1305–14)가 집대성한 것이다. 교황 요한 22세(John 22, 1316–34)의 부록서는 이전의 거듭되는 최종판인 별전과 제 6권 이후에 나온 법전이라는 의미에서 부록서(Extravagantes)라 불린다. 이외에도 1261-1484년까지의 74개의 법령을 담은 공동부록서(Extravagantes Communes)가 있다. 위 6 법전은 로마교회법전(Corpus Iuris Canonici)으로 1582년에 최종 취합된 후, 1917년까지 통용되다가 새 법전(Codex Iuris Canonici)으로 정리되고, 1983년에 현재 사용되는 유일한 법전으로 정착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정리하여 반포하고 현재까지 효력을 지닌 로마교회법은 총 7권 1742조로 잘 정비된 교회법이다.

1권은 11장으로 구성된 일반규범으로서 교회법 일반을 다룬다. 교회법의 성격과 종류, 교회법의 적용 범위와 공적 법률, 정관과 규칙, 법률 행위와 교회의 직무, 시효 등을 다룬다.

2권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3편으로 다룬다. 1편은 신자를 다루며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자의 의무와 권리, 성직자와 성직 자치단과 신자들의 단체를 다룬다. 2편은 교회의 교계 구조이며, 1부에서 교회의 최고 권위인 교황과 주교단, 주교대의원회의와 추기경, 교황청과 교황 사절이다. 2부에서 개교회와 연합인데, 1장에서는 개교회와 주교 및 교구장, 관구와 연합구, 지역공회의와 주교회의, 개교회의 내부 조직, 사제 평의회와 참사회, 성당 담임과 사제를 다룬다. 3편은 수도회인데, 수도회의 조직, 입회 절차, 수도사의 의무와 권리, 재속회 등을 다룬다.

3권은 교회의 가르치는 직무이며, 총 5장에서 설교와 교리교육, 선교활동과 가톨릭교육활동, 대사회 홍보와 출판물, 신앙 선서를 다룬다.

4권은 교회의 성화 임무를 3편으로 다룬다. 1편은 가톨릭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사(성례)이다. 총 7장에서 세례,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와 혼인을 다룬다. 2편은 여타 경배로서 총 5장으로 준성사, 일과 전례 기도, 장례식, 성인과 성화상 및 유해 경배, 서원과 맹세를 다룬다. 3편은 거룩한 장소와 시기인데, 총 2장에서 성당, 經堂경당, 순례지와 제대, 묘지, 그리고 축일과 참회고행일을 다룬다.

5권은 교회의 재산인데, 총 4장에서 재산의 취득, 관리, 계약 및 양도, 신심의사 총칙과 기금을 다룬다.

6권-7권은 말하자면 권징조례이다. 6권은 교회의 제재를 2편에서 다룬다. 1편은 범죄와 형벌 총칙을 총 6장에서 다루고, 2편은 총 7장에서 개별 범죄에 대한 형벌을 다룬다.

7권은 소송 절차를 5편으로 다룬다. 1편은 총 5장으로 구성된 재판 총칙이다. 2편은 총 11장으로 구성된 민사재판이다. 3편은 총 3장으로 구성된 특수 소송 절차이다. 4편은 형사소송이다. 5편은 행정소원과 본당 사목구 주임의 해임 및 전임 절차 등을 다룬다.

로마교회는 일반 역사와 그리고 교회역사와 궤를 같이 하면서 교회법을 정비하였다. 이 법전으로 교회를 치리하고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고 일단 유사시에는 혼란을 피하면서 해법을 찾아 안정을 빨리 회복한다. 게다가 이 법전과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수많은 판례를 채집하여 가히 물샐 틈 없는 법치교회를 구축하였다.

교황은 가히 절대권을 가지고 있다. 1870년 제 1 바티칸공회의는 교황이 신앙과 윤리에 관하여 직분적으로(ex cathedra) 선포하면 그 교의는 無誤무오하다고 결정하였다. 이와 동시에 중세 말기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공회의주의는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다. 교황은 대주교와 추기경을 임명하고 목도리(pallium)을 두르게 함으로써 상하질서를 확립하고, 그들을 다시 출신 지역의 교권 수호자로 파송함으로써 자기들이 말하는 보편교회를 가시적으로 유지한다. 주교는 다시 장로들을 본당으로 파송하여 일사불란한 법질서 속에서 자기들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성사를 집례하여 보이는 지역교회를 유지한다. 그렇지만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이후 평신도들도 자체 회를 만들어 자치적인 활동을 하며 가능하면 교직제도와 충돌하지 않고 교회 안팎에서 활발하게 활동한다.

 

4. 회중정치

회중정치는 감독정치나 회의체제에 의한 치리를 거부하고, 권위가 회중에게 있으며, 회중의 영역을 넘어서서 회중에게 명령이나 지시하는 어떤 귄위도 인정하지 않는 제도이다. 역사적으로는 16세기말에 잉글랜드에서 발생한 제도를 지칭한다. 즉 지역교회의 회중을 완전한 교회로 보며, 회중이 선임한 목사를 중심으로 연합한다.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여왕(1533-1603; 1558년부터 통치) 치하에서 다시 감독을 왕이 임명하는 것은 성경의 치리와 적대적이라는 입장을 가진다. 여왕의 통치 중기부터 런던을 중심으로 하여 분리주의 교회가 생긴다. 브라운(R. Browne; 1550-1633)은 1582년에 ‘회집 교회’(gathered church)를 천명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구역으로 나눈 교구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분리하여 자치를 선택하고 상호 언약을 맺어 회중을 구성하는 헌신된 신자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의 추종자들이 참수형을 당하자, 더러는 암스테르담과 레이든으로 피신한다. 이들은 귀국하여 다시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1620년에 신대륙으로 떠난다.

이런 물꼬가 터지자 성공회의 통일령이나 성공회의 예전을 거부하는 분리주의자와 저항세력인 비국교도 독립파가 공공연하게 또는 지하 세력의 형태로 곳곳에서 등장한다. 대표적인 세력이 침례교도들이다. 이들은 타락한 교회에서 받은 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침례의 방식으로 재세례를 시행하였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를 촉발하였던 잉글랜드 내전 중에 독립파들은 크롬웰(O. Cromwell; 1599–1658)의 지지를 받으면서 절대 다수의 장로교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단 5명의 대표가 회의를 주도할 때도 있었다. 결국 이들은 회의를 떠나고 자기들도 작성에 기여하였던 고백서 내용 중에서 장로교정치만을 제거하고 1658년에 120여 회중이 모여 사보이선언서(Savoy Declaration)를 채택한다. 그러나 1660년 왕정이 복구되고 다시 1662년에 통일령도 회복되자 많은 탄압을 받던 중에 명예혁명에 이어 관용법이 반포되어 드디어 신앙의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이미 많은 이들은 신대륙으로 이주하였고, 신대륙은 교리에서는 예정론을 수용하는 칼빈주의 전통에 서 있지만 치리에서는 회중정치를 채택한 교회가 주를 이룬다.

신대륙으로 이미 떠난 회중파들은 이미 1648년 켐브리지회의(Cambridge Platform)에서 회중정치를 선포하였다. 이들은 놀랍게도 감독정치와 장로정치를 거부하면서도 회중정치만을 채택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교회’로서 저항세력을 탄압한다. 제 1차 부흥운동 이후 18세기 말에 정교분리가 정착하고 드디어 종교의 자유가 자리를 잡는다. 이후 회중교회는 복음주의를 특색으로 하는 2차 부흥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상당수는 유니테리안 사상이나 자유주의에 빠지면서 변질하거나 소멸한다. 회중파는 역사와 교리를 멀리하면서 오직 성경만을 따른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장로교보다도 복음주의적이고 침례교보다는 지성주의적인 특성을 지닌다.

이들은 모든 회중은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자치권을 누리지만, 18세에는 권역별로 서로 돕고 연합활동을 하였다. 영국에서는 19세기 초엽에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회중교회연합을 구성하였고 런던선교회를 조직하여 중국, 동남 아시아, 태평양 제도와 아프리카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토마스 선교사도 이들의 파송을 받았다. 이후 회중교회는 20세기 들어 교회연합 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였고 1908년 인도에서 연합교회를 형성하고 채택한 12신조가 초기 한국교회의 모범적인 신조로 자리 잡았다.

침례교는 잉글랜드의 청교도와 회중교회, 그리고 네덜란드의 재세례파(메노나이트)의 영향을 받아 발생하였다. 이들은 분리주의자로서 일부는 아르미니안 사상을 수용하여 일반침례파가 되고, 일부는 예정론을 수용하는 특별침례파가 된다. 이들은 특히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였고 대표적 인물로는 밀턴(J. Milton; 1608-4)과 번연(J. Bunyan; 1628–88)이다. 침례교는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의 설교로 크게 부흥한다. 캐리(W. Carey; 1761–1834)가 조직한 선교회는 개신교 선교역사의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미국에서는 노예제도 문제로 1845년에 남침례교가 분열하였으나, 미국 내지 선교에 진력하여 북서쪽으로 확장하여 지금은 로마가톨릭에 이어 미국최대 교파이다.

침례교는 양심의 자유와 만인제사장직을 정치의 기조로 삼는다. 회중을 은사공동체로 보면서 은사와 직분 사이의 어떤 분리나 괴리가 없다. 교회의 어떤 결정이라도 컨센수스(consensus)를 지향하며 어떤 회원의 양심도 겁박하지 않는다. 이 공동체는 지역 회중이며 침례교회는 어떤 보편교회도 인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원칙적으로 ‘교회의 보편성’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로마가톨릭교회의 신조로 보고 고백하지 않는다.

정치에서 기조인 양심의 자유를 따라 정교분리를 초기부터 철저하게 주장하였다. 이것은 한 교회만을 인정하고 다른 교회를 용납하는 관용과는 구별된다. 이들의 구호는 ‘자유의 나라와 자유 교회’(A free church in a free state)이다. 이 점에서 침례교는 의도하지 않고 부지불식간에 다원주의를 제창한 셈이다. 전도에 열심이었고 대표적 전도자는 무디(D. L. Moody, 1837-99), 토레이(R. A. Torrey, 1856-1928)와 그레이함(B. Graham, 1918-) 등이다. 이들은 성인세례를 주장하기 때문에 성경교육과 교리교육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신대륙에서 초기 회중교회는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로부터 당회 외의 교회회의를 거부하다가 잠시 이 회의들을 인정한 적도 있다. 그러나 요지는 집합적 회의인 노회나 총회가 아니라 지역 교회가 자유를 가지면서 자체적으로 법규를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집합적인 회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회의 결정이 구속력을 가질 수 없다.

 

5. 장로교정치

대개 칼빈이 장로교 정치를 창안하였다고 하나, 그는 사실 부서(M. Bucer, 1491–1551)와 외콜람파디우스(J. Oecolampadius, 1482–1531)로부터 배웠다. 아우구스부르크평화조약(1555)은 신성로마제국 안에 있는 개신교 군주가 신민의 종교를 결정할 권리를 주었고, 군주가 영적 권한을 감독처럼 갖도록 하였다. 그러나 독일어권 안에서 루터교는 인정을 받았으나 개혁교회는 여전히 비합법적 종교로 부당한 대우를 받다가 베스트팔렌조약(Westfalen, 1648)에서 합법적인 자유를 얻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서북 지방의 바젤이나 스트라스부르크나 베른 등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제네바 등 독립 도시들은 교리와 예배에서 로마교회나 루터파와는 다른 개혁교회였고, 교회치리에서도 감독정치가 아닌 장로정치를 표방하였다. 특히 프랑스와 지금의 네덜란드 및 벨기에, 그리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많은 이들이 칼빈의 제네바로 피난을 오면서 개혁교리와 예배를 따르는 장로정치도 그들이 모국으로 돌아가면서 함께 전파된다.

개혁자들은 교회정치에서 만인제사장직과 다중 직분(세 직분)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루터는 중세 가톨릭교회가 고수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직분의 위계, 임직의 위계, 재치(치리)의 위계질서를 다 거부한다. 모든 성도는 세례로 제사장이며, 성도들은 신분에는 차이가 없이 동등하며 다만 사역에서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신자 사이의 구별은 로마가톨릭교회처럼 질적이지 않고 사역적이며, 모든 직분은 영적이다. 목자와 회중은 교회의 머리이고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상호보족적인 관계를 지닌다. 루터와 칼빈은 이런 식으로 위계질서라는 표현을 기필코 거부하였다.

칼빈은 1541년 두 번째로 제네바의 청빙을 수락하면서 성경적이며 고대교회가 취한 치리(regimen)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첫 사역(1536-1538)과 마찬가지로 역시 관심은 교리와 직분이었다. 2주 후에 선생은 시의회가 임명한 다른 위원 5명과 함께 초안한 「교회법」을 제출한다. 특징으로는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네 직분을 명시했다. 주일 예배 후, 정오에는 아동교리교육반이 있으며, 오후 3시에는 오후 예배와 월,수,금요일에도 성경강해가 있다. 세례는 교회에서만 행하며, 세례반과 성찬상은 강단 옆에 둔다. 목사는 교리의 순결을 지켜야 하며 가르치는 은사를 검증받아 세운다. 목사 추천은 목사회가 하고, 소의회가 승인하며 회중(공동회의)이 동의해야 한다. 칼빈은 안수를 선호하나, 법적으로는 직분을 그냥 설명하고 기도로 임직한다. 설교자는 의회에서 서약문을 따라 서약해야 한다. 목사와 목사후보생은 금요일 오전 7시에 모여 성경공부(Congrégation)를 한다. 특정 본문을 한 설교자가 인도하고 다른 이가 주해를 달며, 마지막으로 칼빈 선생이 마무리한다. 이 공부 후에 현안을 다루는 주례 목사회(compagnie des pasteurs)를 갖는다. 이 모임은 상호 권면(censura morum)의 성격도 갖는다. 즉 1년에 4차례 행하는데, 목사의 교리나 행위에 대한 권면을 상호 공적으로 하여 교리와 삶의 일치를 도모하였다. 목사는 이단, 분열 획책, 교회법 거부, 신성모독과 성직 매매를 금한다.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성경 강해에 취약점, 불필요한 논쟁, 무도한 생활 등도 언급한다. 목사는 여하한 시민적 사안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교사(doctor)는 교회와 고등교육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자를 말한다. 이 일에는 다양한 언어 구사가 필수적이다.

장로는 여러 의회 의원들 중에서 소의회와 목사회가 추천하고 200인 의회가 선출한다. 1년 임기로 연임이 가능하며, 주 1회 당회에서 교회 제반사를 의논한다. 장로는 교인들의 삶을 감독하며 필요하면 목사회에 보고한다. 20인회에서 2명, 60인회에서 4명, 200인회에서 6명을 선출하여 보범적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모든 시민을 감독하게 하자고 제안한다. 선출은 목사회와 20인회가 하며, 200인회가 승인한다. 그러면 목사와 같은 방식으로 서약한다. 무엇보다도 복음을 따라 개혁을 추진한다는 약속이다. 장로회는 목요일에 목사와 회집하여 질서와 관계된 의논을 한다.

그러나 출교권에 관해서는 즉 당회(conistoire)의 의견을 받아 의회가 출교하는지, 아니면 당회가 독립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가 불명확하였다. 행정관은 장로는 자기들의 파송을 받은 대리자로 인식했다. 칼빈, 비레와 함께 초안을 만든 다른 3명의 목사들은 회의에서는 동의하여 놓고 의원들에게 그 이행을 반대하라고 조언하였다. 칼빈은 이들에게 크게 실망했고, 거치고 거만하며 열정과 교리 이해에도 부족하다고 한탄한다. 그래도 목사 사이의 논쟁은 일치를 해치기 때문에 관대한 태도를 취한다. 그럼에도 당회가 구성되고 권징을 시행할 수 있어서 교회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어 만족한다.

집사는 당회원은 아니지만 치리의 일부를 담당한다. 즉 빈자를 도우며, 병원을 담당하여 병자를 돌보는 두 부류가 있다. 병원에는 교사를 두어 교리교육을 통하여 환자들을 가르치고 돕는다. 집사의 선출 방식도 장로와 동일하였다. 당회는 독자성을 갖추지 못한 셈이지만, 이 교회법은 장로직과 집사직을 회복시켰다.

이처럼 칼빈의 개혁은 교리와 예배의 개혁이었고, 교회정치와 권징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의 교회정치적 투쟁은 출교권의 회복이었다. 제네바 시의회는 출교권을 고유권으로 고수하였으나 1555년 4월, 칼빈의 지지자들이 시의회와 시장단을 장악하면서 출교권을 교회의 당회의 고유권으로 넘기고 인정하였다. 사실 그때부터 제네바는 장로정치에 기초한 기독교 도시국가가 된 셈이다. 한 편으로 이것이 중세교회의 흔적인 정교일치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편으로는 항상 칼빈은 교회를 성찬공동체로 보았고, 제네바의 성인 시민은 모두 이 공동체에 속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즉 권징과 정치는 반듯한 시민의 양성이며, 성찬의 성결을 훼손하지 않는 경건한 성도의 믿음을 보존하려는 목적을 지닌다.

제네바와 같은 독립 도시에서는 치리와 권징을 위하여 노회나 총회를 구성할 필요 없이 당회로도 족하였다. 개혁교회가 제네바 밖으로 확산되면서 교회 치리회가 지역의 범위를 따라 노회와 총회를 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교리와 예배, 정치와 권징을 아우르는 칼빈의 목회와 신학은 당시 제네바를 피난처를 삼아 거류하던 유럽 각 처에서 온 이들을 통하여 차츰 그들의 모교회로 전파된다. 곧 프랑스와 화란어권 지역,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온 이들이었다. 이 지역들은 도시 국가 제네바와는 달리 왕국인 반면, 스페인 통치를 받는 화란어권에서는 개혁교회가 지하교회로 형성되면서 상급 귀족을 지지하면서 독립을 일군다. 프랑스에서는 위그노가 가톨릭 세력과 군사적 대결까지 불사하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1559년에 첫 개혁교회 총회를 파리에서 열었고, 스코틀랜드에서는 낙스가 지도자로서 1560년에 국가적으로 개혁교회를 선포한다. 특히 이런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교회 개혁은 불가피하게 ‘위로부터의 개혁’을 표방한 반면, 화란어권에서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이루었다.

낙스가 작성한 제 1치리서(1560)은 직분, 선출 등을 담고 있다. 목사의 선출과 면직은 회중과 당회가 직접 한다. 그런데 순회감독(superintendent) 제도가 있어서 지역 목사들의 설교와 목회, 장로들과 집사들의 사역을 감독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주교와 같은 기능을 하였다. 장로와 집사는 장로들이 2배수로 공천하고 회중이 선출하였다. 집사도 목사, 장로와 함께 치리회원이었다. 1581년에 채택된 제 2치리서는 위그노 교회법의 영향을 받은 멜빌(A. Meilville, 1545-1622)이 초안을 작성하였다. 만인제사장직분과 직분의 동등성에 걸맞지 않던 순회감독 제도를 철폐하고 노회를 구성한다. 어떤 직분이라도 특히 감독이라는 직분 이름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회중 위에 군림할 수 없다. 노회는 목사의 설교와 성례 집례의 정통성 여부, 재정 운용, 치리회의 활동, 다른 자매교회들과의 관계 등을 살핀다. 장로의 임기는 이전까지는 1년 임기제였다가 평생으로 결정하였다. 집사는 더 이상 치리회원일 될 수 없었다. 더 큰 변화는 노회에서 목사의 신상을 다루기 때문에 목사 회원의 수가 장로보다 더 많아야 한다는 규정이다. 이는 첫 치리서가 규정한 목사와 장로의 동등성을 허문 퇴보였다. 이를 뒷받침한 또 다른 규정은, 이전에는 회중이 목사를 직접 청하였으나, 이때부터는 회중의 동의를 전제하고 노회가 목사의 위상을 다 결정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장로정치는 미국을 거쳐서 한국에까지 도입되었다. 이점에서 또 다른 장로정치를 정착시킨 화란어권 교회 정치를 아래에서 대비시키려고 한다.

 

6. 목회적 관점에서 본 한국 장로교 정치 체제의 장단점

위로부터 개혁은 불가피하게 상회와 하회의 개념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영향을 웨스트민스터회의도 받았다. “교회의 치리를 위하여 지역 회중, 지역 노회와 총회의 단계적 종속(subordination)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합법적이며 상응한다.” 이미 회의 자체에서 독립파들이 이 용어와 의미에 대하여 아주 격렬하게 반대하였지만, 왕정에 익숙한 지역의 개혁교회들은 이처럼 상명하복의 교회회의 체제를 채택하였다. 이것이 한국교회에도 자연스럽게 도입되었다. 영미식 장로교는 분명히 상회 개념을 인정하지만, 박형룡은 상회를 다른 용어로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므로 노회와 대회를 ‘상회’라 부르지 말고, 다수의 혹은 광의의 회의들이라고 말함이 나을 것이다.” 장로교 목사인 그는 자기 교의신학의 저변인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따라 개혁파 정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셈이다. 그가 이것을 제대로 정립하고 한국 교회에 정착시켰더라면, 한국 장로교회는 네덜란드 개혁교회론의 기조를 채택하였을 것이고, 현재 한국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교권주의를 올바르게 척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교권주의는 대개 동양적인 위계질서나 유교적인 장유유서(長幼有序)에서 찾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과중되었을 가능성은 있고, 실제로 그렇게 나타나고 있지만, 그 원인은 오히려 웨스트민스터회의가 채택한 ‘종속’이라는 말에 담겨있다. 그리고 직분적으로는 목사 우위의 교회정치가 정착된 셈이다. 찰스 하지가 목사직을 최고 직분이라고 본 것도 예외는 아니다. 장로정치는 감독정치의 폐단과 회중정치의 혼란을 뛰어넘는 장점과 강점을 지니지만, 목사 우위의 상회 정치가 정착된다면 이 또한 그 폐단과 혼란이 클 것이다. 장로정치가 공동의회를 채택하는 것은 감독정치의 폐단을 거부하기 때문이며,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라는 치리회와 이 연장선상에서 노회와 총회라는 치리회를 운용하는 것은 회중정치의 혼란을 막기 위함이다. 그런데 공동회의가 요식적으로 운용되거나 직분에 높낮이가 있고 치리회에 상하회 개념이 정착된다면, 장로정치가 아닌 장로정치 형태로 변형된 것이요 장로정치의 본래 의도와는 동떨어진 치리 형태가 원래의 형태를 대치한 셈이다.

교회정치는 그 순서에서 교리와 예배 다음에 온다. 정치의 사안은 정치 자체에서도 다룰 수 있지만 교리와 예배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그 판단에서 경중은 정치에 앞서 교리와 예배에서 찾아야 한다. 교회정치는 교회의 사안이며, 교리로서 교회론에 속하며, 교회의 현시인 예배를 위하여 존재한다. 교리와 예배를 떠난 교회정치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 하겠다. 이런 폐단은 이미 로마 가톨릭이나 회중정치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장로정치는 이런 폐단을 극복한 정치이지만, 그 운용에 있어서는 늘 개혁하지 아니하면 감독정치와 회중정치에 내재한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장로정치의 특징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장로정치는 만인제사장직에 기초하여 오직 그리스도만이 통치자이시고 이를 위임받은 치리자의 동등성을 우선시한다. 특히 목사의 동등성을 말하지만, 현행 부목사 제도는 진지하게 고려할 대목이다. 나아가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직분적 동등성이기도 하다. 직분은 그 기능에 따르는 고유성을 각각 가지고 있지만 직분 자체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각 직분에게 부여하시기 때문에 높고 낮다는 식의 차별이 없다. 둘째, 치리회를 구성하는 목사와 장로는 장로로서 동등하며, 장로는 회중의 선출을 받지만 직분자로서 회중의 대리자가 아니다. 장로가 회중의 대리자라는 회중교회적 발상이 미국에서 장로교회와 회중교회가 합동하면서 들어왔고 한국교회 안에도 도입되었다. 셋째, 교회의 일체성은 고백일 뿐만 아니라 그 구체적 실천이 노회이다. 그러나 노회나 총회가 교회가 아니라 치리회이다. 설령 노회와 총회에 상회의 개념을 사용한다 하여도, 치리회가 교회를 지배할 수는 없다. 이것이 잘 정립되지 않으면, 노회와 총회의 결정을 지역교회가 임의로 해석하거나 준행하지 아니하는 회중교회식의 변칙도 발생할 수 있다.

우리 교회정치는 교회회의의 개회와 폐회에 대해서 언급한다. 특히 총회는 폐회하면 파회한다고 회장의 선포한다. 모든 회의마다 회장이 있다는 말은 장로정치는 항상 회의로 협의하고 결의하되, 회장과 회원은 회의와 무관하거나 이런 협의와 결의 없이 말하거나 행하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다. 회장은 결코 지배하는 ‘윗사람’이 아니라 회원 중 첫째(primus inter pares)일 뿐이다. 고대교회부터 감독은 이와 반대로 위계질서에서 최상위였고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었다. 장로정치는 이 관행을 철저하게 거부하였다. 나아가 총회가 폐회하면 파회라는 규정은 총회가 상설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장로교회 안에서는 총회 임원회가 파회된 총회의 역할을 상당 부분 대신하고 있다. 이것은 감독제를 취하는 감리교로부터 받은 영향이라고 여긴다. 대정부 사안이나 사회적인 이슈에 있어서 장로정치에서는 상시로 대표자로 나설 이가 없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감독정치로부터 총회장이 총회를 대표하고 총회 업무와 산하 기관을 총괄하며, 총회 임원의 직책은 다음 총회 때까지 계속된다는 조항이 들어왔다. 파한 회의는 존속하지 않으며, 총회가 결의한 사항들은 상비부가 집행할 뿐 정식으로 총회가 다시 소집될 때까지 어떤 결정도 할 수 있는 합법적인 회의가 없다는 사실이다. 장로회정치에서 노회가 상설회의이다. 이에 근거하여 총회를 상설회로 이해하고 임원회가 총회를 대신하는 듯한 운영은 총회를 파회함으로써 교권의 집중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한 우리 선배들이 가졌던 장로정치의 정신과는 위배된다. 설령 이후에 변한 형편 때문에 총회를 폐쇄하는 것이 어렵다면, 첨부 조항으로 교권의 형성을 원칙적으로 막아야 한다. 이 점에서 총회사무실의 위치와 역할도 구체적으로 적시하여 교권의 형성에 가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총회는 매년 모였다 파회하지만 총회사무실은 정규직원을 채용하고 운영한다. 그러다 보면 매년 교체되는 총회장이나 임원과는 달리 총회사무실의 정규직원들은 근무의 연속성에 기초하여 정보와 인맥과 재정의 흐름을 알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교권의 언저리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 이런 폐단이 때때로 노출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 점에서 총회사무실이 없는 화란개혁교회의 정치를 참고할 만하다. 1559년 프랑스 위그노 총회는 총회를 최고회의로 삼는 국가교회 체제를 표방하였지만, 네덜란드 교회는 지역교회의 독립성에서 출발하여 사안에 따라 광의의 치리회를 두는 방식을 채택한다. 만인제사장직과 직분의 동등성을 존중하며, 임기제 장로직, 집사회의 독자적 활동과 당회에 제한적 참석 등이 특징이다. 치리회의 경우 상회로서 총회나 노회가 하회인 지역교회 위에 군림하는 정치를 애써 거부하였다. 같은 신앙고백과 요리문답 등 신조에 기초하여 형성하는 ‘교단’은 위계제도적으로 몰려오는 안팎의 위협으로부터 지역 교회를 견제하고 때로는 막아낸다. 이렇게 교회 안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다스리시는 지도자(마 23:10)이기 때문에 감독정치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다른 면에서 개혁교회의 정치는 지역교회에서 출발하지만 회중정치와도 다르다. 같은 신조 고백으로 이룬 교‘단’은 여러 사안들을 논의하고 결정할 때 그 결정은 모든 지역교회에게 구속력을 갖는다. 그 구속력은 상명하복에 기초하여 지역교회의 독립성을 억압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교회가 치리의 일부를 광의의 회의에 위임하고 참여하고 토론하고 결정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구속력을 지닌다. 이점에서 회중교회도 때로는 다수 지역교회들이 모여 회의(convention)를 하지만, 그 회의의 결정은 참고 사항이지 구속력을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회중정치가 감독정치나 장로정치를 향하여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바를 고려할 필요는 있다. 이 점에서 제네바로부터 배운 화란어권 개혁교회가 취한 입장의 특징이 드러난다.

상회가 아니라 광의의 회의라는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1944년에 카이퍼(A. Kuyper, 1838-1920)를 따른 개혁교회 총회는 카이퍼의 중생전제설 등을 신학적으로 비판한 스킬더(K. Schilder, 1890-1952)가 나치를 피하여 지하 생활을 하고 있는 중에 그가 속한 지역교회의 요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소환하지도 않고 그를 신학교 교수직에서 면직시켰다. 이 당시 총회장이었던 베르카워(G.C. Berkouwer, 1903-1996)은 1990년에 공영 TV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이 그 때 잘못을 범했다고 발언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별 의미가 없는 때 늦은 사과였다. 이미 스킬더를 따르던 교인들은 성경과 도르트 교회법 31조에 호소하면서 그릇된 총회의 굴레로부터 스스로 해방한다는 선언과 함께 별도의 교회를 조직하였다. 게다가 베르카워의 제자로서 자유대학교 윤리학 교수였던 카이트르트(H.M. Kuitert, 1924-)가 1960년대에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할 때에는 오히려 스킬더 면직을 반면교사로 삼아 분열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권징을 시행하지 않았고, 급기야 그는 퇴임 후에 신앙을 완전히 버렸고 무신론자로서 자신이 한 동안 봉사하였던 교회와 신학을 파괴적으로 비판하는 일을 일삼고 있다. 교회정치적으로 스킬더를 면직시키고 연이어 목사직까지 면직시켰던 그 교회는 교리에서 이렇게 변질하였고 급기야는 2004년에 다른 교파와 합동하여 그 모습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교회정치는 교리의 고백과 이로부터 나오는 예배의 순수성을 성경적으로 파수하기 위한 보조 수단이다. 교수 시절 카이트르트가 쓴 한 책의 서명처럼 ‘모든 것이 정치적이지만,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다!’ 교회정치가 교리와 예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정치가 교리와 예배보다 비대하지 않는지, 정치가 모든 것인 양 군림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때이다. 장로교 선배들이 장로정치가 ‘神法신법’이라고 확신한 바를 진정으로 실천하여 교리와 예배의 순수성을 확고하게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치리에 회중이 공동회의를 통하여 직접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권장할 필요가 있다. 노회와 총회가 목사와 장로만이 총대로 참석하기 때문에 회중은 이런 치리회와 결정에서 상당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전체 교회는 회중의 참여가 시급한 상황 속에 살고 있다. 가령 급변하는 현대 사회와 급격히 발전하는 현대 문명은 목사와 장로와 동시에 전문적인 지식과 실제적인 직업으로 전체 교회의 치리에 기여할 수 있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 특히 한국교회가 쇠퇴하고 있는 이때에 많은 교인들의 참여는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교회법은 단순해야 한다. 오랜 역사를 지닌 로마교회법은 교리와 예배와 치리를 빈틈없이 정리하여 가장 안정적인 면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성숙한 만인 제사장으로 이루어진 교회는 최소한의 규정으로 통일과 일체성을 보여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회의가 남겨준 교리와 예배와 정치를 따르면서 복잡하고 번쇄한 교회정치나 권징조례를 피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교회에는 오직 하나의 법, 곧 사랑의 법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교권의 형성을 경계하면서도 교회의 일체성을 교회회의로 확보하려 하였던 장로정치의 선배들의 발자취를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되새기면서 정치적인 면에서 교회를 단정하게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유해무(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  webmaster@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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